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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지용택(56회)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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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경기일보(11. 6.28)
인터뷰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과거 아픔 딛고 이제 인천은 평화·통일의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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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이다. 그가 지난 1975년 근로자들의 자녀를 위한 장학회를 설립하고 지난 1983년 새얼문화재단을 만든지도 어느덧 3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지난 1986년 인천시 중구 신흥동 정석빌딩 작은 식당에서 21명이라는 단촐한 모임으로 출발했던 ‘새얼아침대화’는 300회를 넘어섰고, 회원은 1만3천여명에 이른다. 지난 23일에는 올해로 제19회 ‘새얼 국악의 밤’ 공연이 인천 시민들과 만났고, 매년 가을에 찾아 오는 ‘가곡아리아의 밤’도 28번째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새얼백일장은 지난 1986년 5월31일 제1회 대회를 연 이래 한해도 거르지 않았으며, 첫 대회 당시 141개 학교 학생 833명 참가로 시작해 올해까지 6천556개 학교 재학생 7만6천803명과 학부모 1만1천30명이 참가한 전국 최대 규모의 백일장대회로 성장했다.
인천의 문화와 역사의 한 획을 긋고 있는 지용택 이사장을 인천 중구 신흥동 정석빌딩 새얼문화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Q 요즘 새얼문화재단에서 가장 자주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죽산 조봉암 선생에 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오랫동안 죽산 선생의 무죄를 밝히는데 앞장서기도 했고, 새얼아침대화 300회를 맞는 뜻깊은 날도 죽산 선생의 사상을 재조명하는 강의를 준비했는데. 죽산 선생에 관심을 두고 집중한 이유는 무엇인가.
A 1950년대 인천은 한국 정치의 중심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3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봉암 선생, 제2대 국무총리였던 장면 선생 등 10여년 동안 대권을 바라 보는 인물들이 인천에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인천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인천은 한반도의 중심지이자 우리 겨레가 대륙과 해양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시작점과 같은 곳이다. 인천에서 나고 자랐거나 인천과 관련을 맺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나 죽산 선생이 목숨을 걸고 평화통일운동에 나섰던 것도 이런 이유다.
하지만 죽산 선생은 지난 1959년 7월31일 재판부로부터 유죄 선고를 받은 지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돼 사라져야 하는 비운의 인물이 됐다.
인천이 정치적 선구자의 불행한 죽음이라는 한이 서린 땅이 돼버린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1월20일 북한의 간첩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산 선생이 쓰러진 지 52년만에 대법원은 대법관 전원 합의로 죽산 선생에게 덮어 씌웠던 모든 누명에 대해 무죄를 선언했다.
이제는 인천이 정치적 선각자가 불행해지는 땅이 아니라 소생하는 땅이라는 것을 후배들과 후손들에게 보여 줘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비운의 죽산 조봉암 선생 52년 만에 간첩누명 벗겨 동상은 완전한 복권 상징
정치보다 노동운동 체질 시민들 속에서 호흡하며 진정한 친구로 남고 싶어
Q 죽산 조봉암 선생의 동상을 세우는 기금 모금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다. 새얼문화재단이 나서지 않았다면, 아니 지용택 이사장이 나서지 않았다면 결코 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A 죽산 조봉암 선생의 동상을 건립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인천 출신 정치인 한명을 복권하고 기리고자 하는 게 아니다.
죽산 선생이 남긴 평화통일 사상이나 국민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염원을 되살려 인천이 살고, 우리나라가 살고, 우리 민족이 사는 길로 나아가는 근간을 삼고자 하는 것이다.
인천 시민 한사람 한사람의 힘을 모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스스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동상 건립기금을 모으기 시작한 지 이제 한달 20여일 지났을 뿐인데 벌써 800명이 넘는 인천 시민들이 동참했고 3억1천200만원 상당이 모였다.
재단이 미리 준비해뒀던 1억원을 합하면 현재까지 4억1천200만원 정도가 된다. 동상을 만드는데 모두 7억원 정도 들어갈 것으로 예상했는데, 인천 시민들의 뜨거운 성원이 있어 목표했던 것을 금방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아버지가 10만원, 큰 아들이 10만원, 작은 아들이 10만원씩 모아 가족의 이름으로 갖고 온 기금을 받아 들고는 가슴이 벅차 오르기도 했다.
이것은 인천 시민의 응집력이자 정체성이 될 것이다.
동상이 다 만들어지면 지용택도 결국 그 많은 인천 시민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Q 지용택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좀 듣고 싶다. 정치권의 유혹도 많았을텐데 아직까지 정당에 몸 담지 않고 있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이들도 많다.
A 4·19혁명 때 형무소에서 나와 정치권으로 들어 가지 않은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 대부분이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들어 가면서 정치계로 발을 들였을 때 사실 나도 고민했다. 왜 욕심이 없었겠는가. 이 세상을, 이 사회를 제대로 한번 바꿔 보고 싶다는 의욕을 불태우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길은 아닌 것 같았다. 죽기 살기로 이 길이 아니면 안된다는 신념같은 게 없었다.
나는 대신 노동현장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지난 1963년 전국자동차노동조합 경기지부 교육선전부장으로 노동운동에 처음 뛰어 들었다. 15년 쯤 흐른 뒤에는 한국노총 사무총장을 맡았다. 그때 내가 해놓은 것 가운데 아직까지도 잘했다 싶은 건 근로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회를 만든 것과 준법투쟁 두가지 정도.
당시 운전기사들은 사고를 내면 곧바로 구속되는 일이 많았다. 가장이 일을 못하니 가족들은 당장 생활비 걱정에 아이들 학비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어떻게 하든 아이들이 공부를 그만 두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국노총에 장학회를 만들게 됐고 그게 새얼문화재단의 출발이 된 셈이다.
준법투쟁은 사실 파업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인천 월미도~서울 용산을 운행하던 운수회사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운수 근로자들을 탄압했지만 노동3권이라는 개념도 제대로 없을 때여서 파업은 꿈도 꾸지 못했다.
대신 법이 정한대로 제한속도도 지키고 학교 앞마다 정지하도록 하니 운행시간은 두배로 늘어나 시민들은 항의하고 회사는 당연히 수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결국 회사가 손을 들고 임금을 인상했다. 나는 나중에 업무 방해로 벌금형을 받긴 했지만 새로운 노동운동 방법을 제시한 셈이 됐다.
Q 그 이후로도 정치권의 러브콜이 계속된 걸로 아는데.
A 나는 지금까지 출마한 적도 없지만, 어느 정당에도 몸을 담은 적이 없다. 철저하게 시민들 속에서 시민으로서 문화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사실 정치를 하기엔 스스로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Q 능력이 부족하다고 자평하기에는 지금까지 이뤄 놓은 것들이 많지 않나. 추진하고 있는 사업만 손에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니 욕심도 많아 보인다.
A 그렇게 봐주면 고맙다.(웃음)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처음부터 욕심대로 다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후배들한테는 “작게 시작해 크게 키우라”고 조언한다. 능력도 없으면서 무조건 겉으로 보이는 것만 번지르르하게 키워 놔서는 스스로 감당하기 어렵다. 새얼아침대화도 첫 시작은 고작 21명 뿐이었다. 그때야 누가 이처럼 20년이 지나도록 이어지고 1만명이 넘는 회원들이 생겨 날 것이라고 감히 예측했겠나. 작게 시작하면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무수히 많은 실수도 사고도 모두 다 이겨내면서 나의 경험이 되고 실력이 되고 능력이 된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내가 성장하는 만큼 재단도 함께 커나가고 있는 것이다.
Q 사무실이 온통 책으로 둘러 쌓여 있다. 평소에도 책을 많이 읽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라는데 소장하고 있는 책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
A 사무실에 있는 책도 대부분 개인소장품이다. 집에는 아내와 나 두사람 잘 곳을 빼면 다 책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 다 몇권인지는 세지도 못한다. 책 때문에 도배할 필요도 없었고 이사도 한 20년 동안은 가지 못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으면 된다.(웃음)
사실 후배들한테도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하기는 하지만 책이라는 건 억지로 읽는다고 되는 건 아니다. 습관이 되고 몸에 배야 한다.
그래서 “책은 보는 게 아니라 봐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밥 먹는 것처럼, 잠 자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생활에 녹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저런 바쁜 일 때문에 책 읽을 시간조차도 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책을 많이 읽는 사람과 대화하라고 권한다. 간접 독서라는 것도 있지 않나.
Q 후배들에게 권하는 싶은 책이나 구절이 있다면.
A 나는 형무소에 있을 때 ‘논어’를 처음 접하고 눈이 띄이는 게 이런 거구나 느꼈다. 그 전에는 이런 고리타분 책, 옛날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때 한 글자 한 글자가 새롭게 느껴지고 머릿속 뿐만 아니라 내 가슴 속에도 콕콕 박혀 왔다. 그 뒤로는 ‘논어’ 원문부터 번역본, 해설본 등 가리지 않고 관련 책들은 모두 읽었다. ‘논어’에 보면 공자가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라고 했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뜻이다. 무엇을 하든 열정을 갖고 즐기면서 한다면 못할 게 없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 역시 부끄러운 순간이 많았고 돌아 보면 후회하던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후배들에게 적어도 덜 부끄럽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었다는 정도로만 기억될 수 있다면 만족한다.
그러기 위해 지금도 모든 일에 의무감보다는 즐겁고 기꺼운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대담=김창수부장 cskim@ekgib.com 정리=김미경기자 kmk@ekgib.com
사진=장용준기자 jyjun@ekgib.com
2011년 06월 28일 (화) 김창수 기자 csk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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