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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人터뷰/이세영(63회) 인천사랑운동 시민협의회 회장(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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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신문(11. 5. 4)
인천人터뷰
"인천 사랑에 마음 꿈틀 … 시간·정열 쏟아낼 것"
52. 이세영 인천사랑운동 시민협의회 회장
이세영 인천사랑운동 시민협의회 회장은 꽃게와 벤댕이 이야기부터 꺼냈다. 지금이 살이 오르고 단맛이 나는 제철이란다. 주꾸미는 끝물이라 서둘러야 하고 숭어는 아직 괜찮다고 했다. 또 낙지는 한창 입맛을 돋울 때이며, 굴은 찌게에나 넣어 먹을 만큼 맛이 덜하다고 했다. 그는 바다를 잘 안다. 용유에 태어나 지금껏 그곳에 살고 있다. 유년시절 뛰놀던 곳은 바닷가, 뒷동산처럼 오르내리던 곳은 갯바위섬이었다. 그는 해가뜨는 곳도 해가 지는 곳도 서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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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소년은 인천앞바다를 보며 꿈을 키우고, 정치인으로 인천의 한 시대를 살았다. 그리고 2008년 정치인의 삶을 내려 놓았다. 그의 말을 빌리면 ‘후회도 없고 여한도 없다’고 했다. 고향집에서 유유자적 3년여를 살던 그가 다시 속세로 나왔다.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항간의 소문을 전하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 젓는다.
“인천사람이라 ‘인천 사랑’이란 말에 마음이 꿈틀거렸고, 이마저 사양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열흘 가까이 고민을 거듭하다 지금보다 한차원 높은 ‘인천사랑 운동’을 해보자는 결심을 하고 인사협회장직을 수락했다.
세간의 말을 빌리자면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정치인으로서 미련이 없었나.
= 뒤돌아보니 선거 7번을 치르면서 40년간 나를 버리고 살았더라. 가장으로 남편으로 개인생활이 없었다. 그래서 훌훌 털어버렸다. 남들은 권력이나 명예를 추구했을지 몰라도 나는 큰 욕심이 없었다. 열정, 책임, 그런 것들이 정치인의 삶을 지탱했다. 그래서 그런지 놓을 때도 홀가분했다.
18대 국회의원 선거 패배가 그렇게 결정타였나. 속세를 떠나듯 정치인의 삶을 한순간에 놓았다.
= 그건 아니다. 국회의원 선거는 마지막 도전이었다. 닻을 내리기 위한 준비랄까 인생을 마감하는 수순이었다. 선거 당시에는 아쉬움도 있었고 가슴도 저몄지만 한편으로 후련했다.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은 절반은 성공했고 절반은 실패했다. 성공은 시의원과 두 차례 구청장 역임, 실패는 국회의원 낙방이다. 하지만 인생은 다 그런 것 아닌가. 만족하다고 본다.
난 상황정리가 빠른 편이다. 빨리 잊고 다음 할일을 찾는다. 용유 집에 들어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단절하고 살았다.
은둔자로서의 삶은 어땠나. 소소한 일상들이 즐겁던가. 무료해서 바깥세상이 궁금하지 않았나.
= 자유인으로 만세를 불렀다. 개인생활에 탐닉하면서 밖의 냄새는 맡지 않으려고 했다. 때로 늦잠 자고 동네 패거리들과 소주 한잔 하는 맛도 좋더라. 지금도 선거철만 되면 선거증후군을 앓을 만큼 고생한 아내 박순영(61)과 단란하게 지냈다. 조금이라도 보상해주고 싶었다. 놀러오는 손주들과 놀아주는 것도 재밋더라.
단아원(내집)의 정원을 삽과 호미질로 만들었다. 봄에 다시 피는 꽃망울을 들여다보며 경이로움도 느꼈다. 여유롭고 흡족했다.
그러다 다시 나오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정치적 야망 때문에 다시 이름표를 달았다는 등 들려오는 소문들이 어지러웠다. 가족들의 반대로 만만치 않았을 텐데….
= 누누이 말했지만 미련 없다. 다만 인천사람이라 인천에 대해 관심을 버릴 수는 없었다. 인천사랑은 선거전부터 쭉 해왔던 일이고. 인천대학생 총연합회 회장, 옹진군민회장, 인천미래를 생각하는 시민모임 고문, 신공항건설대책 특위 위원장 등의 활동들도 인천을 사랑해서 맡았던 것 아닌가.
제일 먼저 안사람과 의논 했다. 공식직함을 갖지 않기로 약속한 터라 반대할 줄 알았는데 선뜻 하라고 하더라. 이거는 당신이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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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명함을 보고 기관에 있는 사람이 ‘인천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라고 하더라.(웃음) 왜 무서우냐 하니 당신 입 하나가 충격이 호랑이와 같다 하더라.
얘기가 나왔으니 가족 얘기 좀 하자. 용유에서 430년간 살아온 전주 이씨 문중 14대 종가라고 하더라. 집안에 장군 두명이 나왔다는데.
= 효령대군 19대 손이다. 내집 단아원은 선대에 물려받은 것이고. 7대조가 무과에 급제해 어사 달고 장군이 됐다. 그리고 육사출신 아랫동생이 투스타 진급을 앞두고 죽었다. 가슴 아픈 이야기라 좀 그런데….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다 몸이 망가졌다. 지병인 당뇨로 진급이 좌절되자 자살했다. 군인으로서 빛나가야하는 데 두고두고 아리다. 형으로서 후회되는 것도 있고.
고백하자면 선조들께도 죄송하다. 선거빚이 무려 7억 가까이 되더라. 그래서 땅 좀 팔았다. 형제들에게 나눠주고 빚을 갚았다.
인천사랑운동 시민협의회 회장을 맡았으니 물어보자. 토박이만 ‘인천사람’인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토박이만 주류로 친다고들 하더라. 또 어떤 이들은 외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 인천의 정체성이 없다고 한다. 치유나 극복 방법은 없을까.
= 토박이 주장 하지 말아라. 그건 시대적 착오다. 태어난 곳은 마음의 고향이고 사는 곳은 진짜 고향아닌가. 토박이들은 그들을 인천사람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타지역 향우회에 얼굴을 많이 내민다. 거기가면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을 인천으로 돌려달라고 당부한다.
간판부터 고쳐야 한다. ‘○○식당’ 고향 이름 따서 내건 간판이 무수하다. 인천사랑 이런 거부터 시작해야 한다.
역대 민선시장 중 인천출신은 없다. 앞에서 말한 대로라면 인천사람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는 것이 바람직
한 것인가.
= 그건 다르다. 정치적 논리에 의해 해석해야 한다. 임명제 시절부터 정통 인천맨은 거의 없다. 그래서 중심점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바꿔보자는 말도 나오고. 정치적 권력에 의해 필요성에 의해 시장이 만들어졌다. 타 지역은 안 그렇다.
첫 민선 선거에서 인천사람을 시장으로 만들었다면 자연스럽게 전통이 생겼을 거다. 인천출신인가 아닌가는 따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천사람인가는 검증해보고 인천을 잘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지지하겠다.
앞으로 인천의 선거판은 영남대 호남 등의 출신지 대결구도는 더 이상 안된다. 자격이 있다고 인정할 만한 인천만의 리더십을 가진 인물을 선출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원로나 오피니언 리더들도 나서서 유도해야 한다.
작은 개념에 매달릴 만큼 인천이 한가한 도시는 아니다. 10년 후 인천인구는 400만이다. 그 중 다국인이 50만 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출신의 장벽이나 대전제는 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거대한 밑그림을 가지고 인천사랑운동을 펼쳐야 할 텐데. 특별한 구상이 있나.
= 인천의 어른들이나 중견이 인천에 대해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장이 없다. 소통하고 순환하는 유기적인 구조가 없지 않나. 열심히 고민 중이다. 기존 월례강좌를 시민강좌로 확대하려 한다, 말하자면 ‘열린 광장’을 만들고 싶다. 강화쌀 팔아주기도 ‘인천사랑’이고, 떠나려는 기업을 잡는 것도 ‘인천사랑’인데…. 기업이 만족한 생산활동을 할 수 있도록 파격적 지원을 찾아주고도 싶다. 인천사랑의 카테고리에 걸려들지 않는 것이 있겠나.
국제적인 마인드로 인천을 보듬어 가야한다. 아시아·태평양 중요도시로서 그 안에서 인천이 가져가야할 중심테마를 가지고 뭉쳐야 한다. 고민할 것이다. 꾸준히.
여담인데 중구청장 시절 얘기를 해보자. 1999년 인현동 화재사건때 삭발을 했다. 왜 그랬나. 의지의 표현인가 항의였는가.
= 솔직히 말하면 일주일간 구청에서 야전침대 펴놓고 잤다. 머리에 때가 껴서 무지 가려웠다.(웃음). 당시 정치문화는 사건의 책임을 물어 수습하거나 잠재우는 것을 파생적 수단으로 삼았다.
지나간 이야기라 털어놓는다. 직감적으로 시장이나 구청장이 제물이 되겠구나 싶어 당시 최기선 시장과 회동했다. 그 자리에서 시장이 국회 행자위 사건처리 보고 전화를 받았다. 내가 귀가 밝거든(웃음) 전화기 너머에서는 중구청장을 지목하더라. 얘기 끝내고 신포동 와서 바로 머리를 깎았다.
처음 듣는 비화다.(웃음)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나. 조사를 받은 걸로 알고 있는데. 심정은 어땠나.
=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돈 받았나 뒤지고 민원처리과정 의혹있나 재조사하고 그러더라. 속으로 그랬다. 그래 개같은 나라. 그래 붙어보자. 거짓말탐지기 조사도 받았다. 3일 낮밤을 안자고 버텼다. 결국 풀어주더라. 나온게 없었으니까.
맘만 먹으면 건축허가 하나쯤 뚝딱 해줄 수도 있었다. 왜 안했나.
= 내 좌우명이 맹호는 굶주려도 풀을 먹지 않는다다. 또 여의도도 가고 싶었으니까.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정치 끝내고 나니 ‘챙기지도 못한 저 병신’ 하더라.
시민들에게 공개적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아무쪼록 인천사랑에 마지막 시간과 정열을 쏟고 싶다. 같이 가자고 하고 싶다. 같이 ‘황해의 중심도시 인천’ 밑그림을 그리고 세부설계도 함께 하자고 하고 싶다. 물론 펜과 도화지는 인천사랑표 제품이다.
2011년 05월 04일 (수)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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