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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학도의용대원 정태원(47회) 옹(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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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신문(10. 6.25)
"전쟁통 어머니와 이별 임종도 못지킨 불효자"
6·25 참전 인천학도의용대원 정태원 옹
“1950년 12월18일 눈내리던 겨울 싸리재길에서 어머니와 헤어졌는데 그게 어머니와 이승에서의 마지막이었지.” 6·25에 참전 인천학도의용대원 정태원(80)옹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아직도 눈에 선해, 애지중지하시던 외아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시던 모습이…. 마지막 작별 인사였지. 이듬해 4월15일 위병이 도져 돌아가셨어.” “진해에서 포병대 창설요원으로 훈련받던 중 동네분을 만나 소식을 전해 들었지. 임종도 지키지 못한 불효자야.”
노환으로 병석에서 만난 정태원옹의 기억은 또렷했다. 정확한 날짜와 상황까지 세세하게 더듬어 냈다.
얼마 후 아버지가 소식을 듣고 진해로 외아들을 찾아왔다. 상사의 배려로 아버지와 하룻밤을 같이 자고 인천에 와서 성묘를 마치고 자대로 복귀했다.
정 옹은 인천토박이로 창영초등학교와 인천상업중학교(6년제)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1학년 재학중 6·25를 만났다.
성균관대 1학년생이었던 그는 고향 인천에서 내내 도망다니며 은신했다. 눈에 띄는 즉시 이민군으로 끌려가야했기 때문이다. 그는 외가의 아궁이속에 숨어 지내다 인천상륙작전을 맞았다. 그해 겨울 다시 전세가 기울었다. 그 당시 급조된 인천학도의용대원으로 부산행을 택한 것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북으로 끌려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정 옹은 지금도 인천학도의용대원 신분을 부인한다. 학도호국대원 신분으로 인천학도의용대원과 함께 움직였다고 강조했다. 당시 동네 후배였던 임준식·문병하·인재문(당시 17세)과 걸어서 부산에 당도한 후 마산에서 해병대 6기생으로 입대했다.
“인천 떠나올때 후배 부모님들이 동생들을 잘 보살펴달라고 간곡히 당부하셨기 때문에 해병대 입대도 같이 했지. 동생들이 무사히 돌아와 내 체면은 세울 수 있었어.”
1954년 10월20일 제대해서 고향 인천으로 돌아왔다. 그는 가급적 전투 얘기는 피하고 싶어했다.
“피바다 얘기는 해서 뭐 하겠어. 서로 살겠다고 찔러 죽였는데…. 14살 어린 소년병도 있었는데 그 나이에 뭘 알았을까….” 전사(戰史)에 남아있는 강원도 최전방 펀치볼·서부전선 장단서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 외에는 말을 아꼈다.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까이서 목격했을 뿐이라고 에둘렀다.
“난 살아왔어. 다치지도 않았고…. 다른 이들은 아들이 죽고 남편이 죽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해.”
제대 후 그는 대학에 복학하지 못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에 대학은 사치였다. 직장을 구하고 서둘러 가정을 꾸렸다.
“요즘 젊은이들은 마치 전쟁을 한편의 영화처럼 생각하겠지. 전쟁은 잔혹한 삶과 죽음이 있는거야. 과거를 잊지 말아야해.” 팔순의 노병은 ‘해병 전우회’라고 새겨진 빨간모자를 항상 쓰고 다닌다. 참전용사 전력이 자랑스러워서 라기보다 후대가 역사를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2010년 06월 25일 (금)
유승희기자 ysh8772@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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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님의 댓글
항상 빨간 해병대 모자를 쓰시고 동창회 행사에 나오시는 47회 선배님이십니다.
6년 전 선배님과 만나 소주를 각 5병씩 + 생맥주 1500CC 마시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